재커리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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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커리 테일러는 1849년 미국의 12대 대통령으로, 멕시코-미국 전쟁의 영웅이었다.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켄터키에서 성장한 그는 군에 입대하여 미영 전쟁, 블랙 호크 전쟁, 세미놀 전쟁 등에서 활약하며 소령, 대령, 준장으로 진급했다. 멕시코 전쟁에서 팔로 알토 전투와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승리하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휘그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중 캘리포니아의 자유주 편입 문제를 두고 남부와 대립했으며, 니카라과 운하 건설을 위한 클레이턴-불워 조약을 체결했다. 1850년 재임 중 사망했으며, 사후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부검 결과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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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커리 테일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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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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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제12대 |
직위 | 대통령 |
임기 시작 | 1849년 3월 4일테일러의 임기는 1849년 3월 4일 정오 EST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이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테일러는 다음 날까지 취임을 거부했음. 밀러드 필모어 부통령도 그날 취임하지 않았음. 대부분의 법학자들은 헌법에 따라 테일러가 선서를 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의 임기는 3월 4일에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음. |
임기 종료 | 1850년 7월 9일 |
전임자 | 제임스 K. 포크 |
후임자 | 밀러드 필모어 |
부통령 | 밀러드 필모어 |
출생일 | 1784년 11월 24일 |
출생지 | 버지니아주바버즈빌 |
사망일 | 1850년 7월 9일 |
사망지 | 워싱턴 D.C. |
안장 장소 | 재커리 테일러 국립묘지 |
정당 | 휘그당 |
배우자 | 마거릿 스미스 (1810년 6월 21일 결혼) |
자녀 | 6명 (세라, 메리, 리처드 포함) |
아버지 | 리처드 테일러 |
수상 | 미국 의회 금메달 (3회) 미국 의회의 감사 |
직업 | 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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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경력 | |
군대 | 미국 육군 |
복무 기간 | 1808년–1849년 |
최종 계급 | 소장 |
지휘 | 주둔군 |
전투 | 1812년 전쟁 해리슨 요새 포위전 크레딧 아일랜드 전투 블랙 호크 전쟁 제2차 세미놀 전쟁 오키초비 호수 전투 미국-멕시코 전쟁 팔로 알토 전투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몬테레이 전투 부에나 비스타 전투 |
멕시코 주둔군 사령관 | |
순서 | 초대 |
임명권자 | 제임스 K. 포크 |
임기 시작 | 1845년 4월 23일 |
임기 종료 | 1848년 7월 23일 |
전임자 | 직책 신설 |
후임자 | 윌리엄 데이븐포트 |
2. 어린 시절
버지니아주 바버스빌 근처에서 6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 리처드와 사라 테일러는 버지니아 주 지역 농원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 리처드는 미국 독립 혁명에서 사관으로 복무하였으며, 1783년 켄터키주 루이빌 근처에 있는 6,000 에이커의 대지를 받았다.[65][66][67]
재커리 테일러는 1784년 11월 24일, 농장이었던 버지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영국계 농장주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외할아버지인 윌리엄 스트로더의 집이었던 헤어 포레스트 팜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4]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역사적 표지판에 기록된 오렌지 카운티의 또 다른 영지인 몬테벨로가 있다.[5] 그는 형제 다섯 명 중 셋째였고(여섯째는 유아기에 사망)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사라 댑니 테일러였고, 아버지인 리처드 테일러 대령은 미국 독립 전쟁에서 중령으로 복무했다. 아버지 리처드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과 함께 싸웠다.[66]
테일러는 청교도이자 플리머스 식민지의 지도자였으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이주해 메이플라워 조약에 서명한 윌리엄 브루스터 장로의 후손이었다.[69][70][71][72] 또한 식민지 시대 상인이자 대령이었고, 메이플라워호 승객인 아이작 앨러턴과 피어 브루스터의 아들인 아이작 앨러턴 2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 계보를 통해 테일러는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과는 사촌 지간이었다.[73] 그는 또한 버지니아의 유명한 리 가문의 일원이었고, 남부 연합군의 장군인 로버트 E. 리와는 먼 사촌뻘이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와도 혈족 관계였다. 제퍼슨 데이비스는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가족은 척박해진 버지니아 땅을 버리고 서쪽으로 이주하여 오하이오 강 근처, 미래의 루이빌에 정착했다. 테일러는 작은 나무 오두막에서 자랐고, 가세가 나아지자 벽돌집으로 이사했다. 유년 시절에는 켄터키 주 루이빌 근교의 오지에서 통나무집에서 살았고, 가족이 늘어남에 따라 벽돌집으로 이사했다.[67] 테일러는 7명의 형제 자매와 함께 살았고, 아버지는 1800년까지 약 4000ha(10,000 에이커)의 토지와 26명의 노예를 소유했다.[67]
켄터키 경계 지방에는 학교들이 없었지만, 재커리는 가정 교사들 아래에서 공부하였으며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연습적 상식들을 얻었다. 켄터키 오지에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테일러는 아버지와 가끔 고용된 가정교사에게서 기초적인 교육만 받았다.[65] 테일러는 학업에 뛰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필체, 철자, 문법은 "평생 거칠고 투박했다"고 한다.[67]
그는 인디언 전쟁 도중에 자라왔으며, 아버지로부터 독립 전쟁의 이야기를 들었다. 테일러는 성장하면서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67] 1808년 육군에 입대하여 중위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 대위로 진급하였다.
2. 1. 테일러의 가족
1810년 6월 21일 테일러는 메릴랜드주 농장주의 고아딸 마거릿 스미스(1788~1852)와 결혼하여 슬하 1남 5녀를 두었다.[10] 딸 사라는 남부 연합의 대통령이 된 제퍼슨 데이비스와 결혼하였으며,[10] 아들 리처드는 남북 전쟁 동안에 남군의 장군으로 복무하였다.[10]- 앤 매칼 테일러 (1811~1875):[10] 1829년 스넬링 요새에서 근무하는 미국 육군 군의관 로버트 C. 우드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들인 존 테일러 우드는 미국 해군과 남부 연합 해군에서 복무했다. 우드의 자녀로는 북서 기마경찰의 대행 국장이자 유콘 준주의 국장을 역임한 재커리 테일러 우드와 영국 육군 중위 찰스 캐롤 우드가 있다.
- 사라 녹스 "녹시" 테일러 (1814~1835):[10] 블랙 호크 전쟁이 끝날 무렵 아버지 부하 장교였던 제퍼슨 데이비스와 결혼했으나, 결혼 후 석 달 만에 루이지애나주 세인트 프랜시스빌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10]
- 옥타비아 패넬 테일러 (1816~1820):[10] 유년기에 사망했다.
- 마가렛 스미스 테일러 (1819~1820):[10] 테일러 가족이 "담즙열"로 고통받을 때 옥타비아와 함께 유아기에 사망했다.
- 메리 엘리자베스 "베티" 테일러 (1824~1909):[10] 1848년 윌리엄 월리스 스미스 블리스와 결혼했고, 1858년 필립 펜들턴 댄드리지와 재혼했다.
- 리처드 테일러 (1826~1879):[10] 남부 연합군 장군이었다. 1851년 루이즈 마리 미르트 브링지어와 결혼했다.[12]

결혼 후, 테일러 부부는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Baton Rouge, Louisiana)에 있는 낡은 오두막을 사서 1812년 전쟁 직전 개조를 마쳤다. 같은 시기 그는 루이빌에서 많은 은행 주식을 사기 시작했으며,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 유역 토지를 사들였다. 여기에는 루이지애나주 웨스트 펠리시아나 패리시(West Feliciana Parish, Louisiana)와 미시시피주 윌킨슨 카운티(Wilkinson County, Mississippi)의 부동산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수익성 있는 투자가 되었다. 그는 군무로 자주 외출했지만, 배턴루지를 주거지이자 가족의 집으로 유지했다. 1841년부터 1844년까지 그는 군 복무지에 더 가까이 있기 위해 가족과 함께 아칸소주 포트 스미스(Fort Smith, Arkansas)로 이사했다.
1842년 4월, 테일러는 미시시피주 제퍼슨 카운티(Jefferson County, Mississippi)에 있는 사이프러스 그로브 플랜테이션(Cypress Grove Plantation)을 매입하여 1823 에이커 규모의 부동산과 노예 81명을 소유하게 되었다. 1850년 그가 사망할 당시에는 그 부동산에 노예 127명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반노예제 보고서(Anti-Slavery Reporter)''는 테일러가 적어도 200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13] 사이프러스 그로브는 낮은 목화 가격, 잦은 홍수, 악천후, 해충 문제로 인해 테일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테일러와 그의 관리인 토마스 링골드는 자급자족을 위해 노력했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목재를 판매하고 광범위한 제방과 수문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는 평화 시에도 부재지주였고, 그의 아내는 그 부동산을 방문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들 리처드를 공동 관리자로 임명했다.
3. 군사 경력
1806년 켄터키 민병대에서 잠시 복무한 후,[14][15] 1808년 5월 3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7보병연대의 소위로 임관되었다.[7][16] 1810년 11월에는 대위로 진급했다.[74] 인디애나 준주에 배속되어 빈센스 요새 지휘관이 탈영하자 테일러가 후임이 되어 1814년까지 지휘를 맡았다.[74]
미영 전쟁에서 테일러는 포트 해리슨을 지휘하며 테컴세가 이끄는 쇼니족과 싸웠다.[65] 테일러는 이 전투의 공적으로 전시 소령으로 진급했고,[65] 와일드캣 크릭 전투 기간 동안 제7연대를 지휘했다. 1814년 봄, 테일러는 벤자민 하워드 준장 휘하에서 다시 전투에 참여했다. 하워드가 병이 들자 테일러는 세인트루이스에서 미시시피 강을 따라 430명의 원정대를 이끌었다. 크레딧 아일랜드 전투에서 테일러는 원주민 부대를 물리쳤지만, 원주민들이 영국 동맹군과 합류하자 후퇴했다. 그해 10월 그는 오늘날 일리노이주 워소 근처에 있는 존슨 요새 건설을 감독했다. 이 요새는 미시시피 강 상류 계곡에서 미군의 마지막 거점이었습니다. 몇 주 후 하워드가 사망하자 테일러는 요새를 버리고 세인트루이스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15년 전쟁이 끝나자 대위로 강등되었고, 군에서 사임했다. 그는 1년 후 소령으로 임관되면서 다시 군에 복귀했다.
1819년 4월, 중령으로 진급하였다.[74] 1828년 5월, 테일러는 미시간 준주(현 미네소타주)의 스넬링 요새를 1년 동안 지휘하고, 그 후 1년 동안 인근 크로포드 요새를 지휘했다.
블랙 호크 전쟁 중에는 위스콘신에서 복무하여 1832년 블랙 호크 추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테일러는 1832년 4월 제1보병연대 대령으로 승진했다.[74] 테일러는 헨리 앳킨슨 장군 휘하에서 여름 내내 블랙 호크 추장의 부대를 추격하고 방어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1832년 8월 전쟁이 끝나면서 그 지역에서 미국 확장에 대한 최종적인 인디언 저항이 종식되었다.
1837년, 제2차 세미놀 전쟁이 발발하자 테일러는 플로리다로 파병되었다. 그는 토머스 S. 제섭 장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보급기지이자 통신 중심지로서 가드너 요새와 베이징거 요새를 건설했다. 1837년 12월 15일 오키초비 호 전투에서 세미놀 족 인디언을 꺾었다. 이 승리로 테일러는 준장으로 명예 진급(특진)을 받았다.[74] 1838년 5월, 제섭이 사임하면서 테일러는 플로리다 주둔 미군 전체의 지휘권을 2년간 맡게 되었고, 군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올드 러프 앤 레디(Old Rough and Ready)"라는 별명을 얻었다. 테일러는 세미놀족 추적에 사냥개를 사용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3] 1841년 아칸소의 스미스 요새에 있는 본부들과 함께 육군의 서부 분할의 두 번째 군관구에서 사령관이 되었다.
1808년 소위로 임관된 이후 미영 전쟁(1812년 - 1815년), 블랙 호크 전쟁(1832년), 그리고 제2차 세미놀 전쟁(1835년 - 1842년) 등 연이어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쟁들에서 테일러는 여러 차례 "인디언을 학살"하는 전공을 세우며 진급을 거듭했다.
1844년 4월, 텍사스 공화국의 합병을 예상하여 테일러는 루이지애나주 제섭 요새로 파견되어 멕시코가 영토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막도록 명령받았다.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1846년에 리오그란데 요새로 테일러를 파병했다. 멕시코군이 테일러의 군대를 공격했을 때, 테일러는 4대 1이라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멕시코군을 격파했다. 포크는 멕시코에 선전포고했다. 선전포고와 동시에 테일러는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초전에서 멕시코군에 승리한 후에도 대통령령을 무시하고 멕시코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멕시코군 주력을 격파하고 개선했다.
테일러는 〈팔로 알토 전투〉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멕시코군을 물리쳤다. 그는 훨씬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이 지휘하는 멕시코 "북부군"을 패퇴시키고 리오그란데 너머로 퇴각시켰다. 테일러는 나중에 아리스타와의 포로 교환 전에 부상당한 멕시코 병사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한 것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미국 부상자들에게 제공된 것과 같은 치료를 그들에게 제공했다. 부상자들을 돌본 후, 그는 전투 중 사망한 미국과 멕시코 병사들의 장례식을 치렀다.[18] 9월 테일러는 몬테레이 전투에서 멕시코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그 도시가 난공불락이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3일 만에 함락시켰다.
1847년 2월,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테일러는 약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2만 명의 멕시코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승리로 테일러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이 전쟁에서 테일러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그의 지휘 스타일을 두고 "멕시코 전쟁 초반 두 차례 교전에서 테일러 장군이 지휘한 군대보다 더 훌륭한 군대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2]
계급 휘장 | 계급 | 소속 | 날짜 |
---|---|---|---|
![]() | 소위 (1st Lieutenant) | 정규군 (Regular Army) | 1808년 5월 3일 |
![]() | 대위 (Captain) | 정규군 | 1810년 11월 30일 |
![]() | 명예소장 (Brevet Major) | 정규군 | 1812년 9월 5일 |
소장 (Major) | 정규군 | 1814년 5월 15일 | |
![]() | 중령 (Lieutenant Colonel) | 정규군 | 1819년 4월 20일 |
![]() | 대령 (Colonel) | 정규군 | 1832년 4월 4일 |
![]() | 명예준장 (Brevet Brigadier-General) | 정규군 | 1837년 12월 25일 |
![]() | 명예중장 (Brevet Major General) | 정규군 | 1846년 5월 28일 |
중장 (Major General) | 정규군 | 1846년 6월 29일 |
참고 - 테일러 장군은 대통령이 되기 직전인 1849년 1월 31일에 미국 육군에서 사임했습니다.[23]
3. 1. 인디언 전쟁
1808년 소위로 임관된 이후[74] 미영 전쟁(1812년 - 1815년), 블랙 호크 전쟁(1832년), 그리고 제2차 세미놀 전쟁(1835년 - 1842년) 등 연이어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쟁들에서 테일러는 여러 차례 "인디언을 학살"하는 전공을 세우며 진급을 거듭했다.1812년 전쟁 동안 테일러는 인디애나 경계 지방에 있는 해리슨 요새에서 방어 업적으로 소령으로 진급했다.[65] 미영 전쟁에서 테일러는 포트 해리슨을 지휘하며 테컴세가 이끄는 쇼니족과 싸웠다.[65] 1819년에는 중령이 되었다. 그는 블랙호크 전쟁 중에 위스콘신에서 복무하여 1832년 블랙 호크 추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1837년에는 플로리다로 보내져 12월 15일 오키초비 호 전투에서 세미놀 족 인디언을 꺾었다. 이 승리로 테일러는 준장의 명예 진급(특진)을 받았다. 1841년 아칸소의 스미스 요새에 있는 본부들과 함께 육군의 서부 분할의 두 번째 군관구에서 사령관이 되었다.
3. 2. 멕시코 전쟁
1846년 미국의 텍사스 병합에 멕시코는 전쟁을 일으켰다. 테일러는 약 4천 명의 군인들과 함께 리오그란데강으로 파견되었다. 멕시코는 이 전진을 침입으로 간주하여 멕시코군이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 강을 건넜다.테일러는 〈팔로 알토 전투〉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멕시코군을 물리쳤다. 그는 훨씬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이 지휘하는 멕시코 "북부군"을 패퇴시키고 리오그란데 너머로 퇴각시켰다. 테일러는 나중에 아리스타와의 포로 교환 전에 부상당한 멕시코 병사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한 것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미국 부상자들에게 제공된 것과 같은 치료를 그들에게 제공했다. 부상자들을 돌본 후, 그는 전투 중 사망한 미국과 멕시코 병사들의 장례식을 치렀다.[18] 미국은 5월 13일 전쟁을 선언하였고, 테일러는 멕시코로 전진하여 몬테레이와 마타모로스를 점령하였다.
이 승리 후에 테일러는 멕시코의 중앙 협곡에 침입군을 이끄는 선택을 보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제임스 K. 포크는 테일러가 대립당 휘그당에 호의를 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포크 대통령이 인기있는 휘그당 지도자의 번창에 위협을 느껴 선거 운동을 이끄는 데 윈필드 스콧을 임명하였다.
1847년 2월 22일~23일에 스콧의 군대가 패하기 전에 약 5,000명의 테일러의 군대가 16,000명과 20,000명 사이의 멕시코군에게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공격을 받았다. 테일러는 산타 아나 장군의 군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전은 테일러의 장군적 정신보다 그의 사관들의 실력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승리는 테일러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이 전쟁에서 테일러 휘하에서 복무했으며, 그의 지휘 스타일을 두고 "멕시코 전쟁 초반 두 차례 교전에서 테일러 장군이 지휘한 군대보다 더 훌륭한 군대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2]
4. 대통령 후보 임명
재커리 테일러는 1848년 이전에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고, 투표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무정치적이었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는 자신을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국가를 위한 강력하고 건전한 은행 시스템을 믿었으며,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1836년에 미국 제2은행의 붕괴를 허용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 서부로의 노예제 확장은 실용적이지 않다고 믿었는데, 그 이유는 목화나 설탕(노예제의 결과로 대량 생산된 것) 모두 농장 경제를 통해 쉽게 재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확고한 미국 민족주의자였으며,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목격한 경험으로 인해 탈퇴는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는 나쁜 방법이라고 믿었다.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미국의 승리 이전에 이미 테일러를 대통령으로 지지하는 정치 클럽들이 결성되었다. 그의 지지는 휘그당과 민주당, 북부와 남부, 폴크와 헨리 클레이와 같은 국가 지도자들의 동맹과 반대자들을 포함하여 이례적으로 광범위한 정치 집단들로부터 얻어졌다. 1846년 말까지 테일러의 대선 출마 반대는 약해졌고, 그의 원칙이 휘그당의 정통과 유사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테일러는 폴크와 그의 정책 모두를 혐오했고, 휘그당은 1840년 이전 승리 후보였던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성공 이후 또 다른 전쟁 영웅을 대통령으로 지명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많은 남부 사람들은 테일러가 멕시코로부터 흡수된 새로운 영토로의 노예제 확장을 지지한다고 믿었고, 테일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 그러한 확장에 반대하는 윌못 조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제안했을 때 일부는 분노했다. 이러한 입장은 미국 북부의 활동적인 반노예제 요소들로부터 그의 지지를 높이지 못했는데, 그들은 테일러가 단순히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항을 강력히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폐지론자들은 그가 노예 소유주였기 때문에 테일러를 지지하지 않았다.
테일러의 대선 후보 지지가 커짐에 따라 그는 두 당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했지만, 만약 투표를 했다면 1844년 휘그당의 헨리 클레이에게 투표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1847년 9월에 널리 알려진 편지에서 테일러는 여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다른 국립 은행 설립에 찬성하지 않았고, 낮은 관세를 지지했으며, 대통령은 법률 제정에 어떠한 역할도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테일러는 대통령이 법률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법률이 명백히 위헌적인 경우에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48년 2월, 테일러는 다시 어느 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휘그당으로 자신을 밝히기를 주저한 것이 그에게 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거의 빼앗길 뻔했지만, 켄터키의 존 J. 크리텐던 상원의원과 다른 지지자들이 마침내 그에게 자신을 휘그당원이라고 선언하도록 설득했다. 클레이는 휘그당 내에서 강력한 지지를 유지했지만, 윌리엄 H. 수어드와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휘그당 지도자들은 휘그당의 다른 성공적인 대통령 후보였던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성공을 재현할 수 있는 전쟁 영웅을 지지하기를 열망했다.
1848년 휘그당 전당대회에서 테일러는 클레이와 윈필드 스콧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다. 전당대회는 부통령 후보로 밀러드 필모어를 선택했는데, 그는 뉴욕의 저명한 휘그당원으로 하원 세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1844년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했었다. 필모어의 선택은 노예 소유주인 남부 출신의 사람을 지명한 것에 분노한 북부 휘그당원들과의 화해 시도였으며, 당의 어떤 파벌도 최종 후보에 만족하지 못했다. 테일러가 지명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처음에는 불분명했는데, 그는 전당대회 결과를 알리는 편지에 답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우편 요금을 피하기 위해 지역 우체국에 자신의 우편물을 배달하지 말라고 지시했었다.[24]
테일러는 선거 운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유권자들과 직접 만나거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는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투표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24] 그의 선거 운동은 크리텐던에 의해 능숙하게 지휘되었고, 매사추세츠의 다니엘 웹스터 상원의원의 늦은 지지로 강화되었다.
민주당은 미시간주의 상원 루이스 캐스와 켄터키 주의 윌리엄 O. 버틀러 장군을 후보로 임명하였다. 휘그당보다 더욱 통합되지 못했는데, 전직 민주당 대통령인 마틴 반 뷰런이 당으로부터 이탈하여 반노예제 자유토양당의 후보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반 뷰런은 영토로의 노예제 확장에 반대하는 많은 민주당원과 휘그당원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중요한 뉴욕주에서 민주당 후보인 루이스 캐스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선거 운동이 일어나는 동안에 휘그당과 민주당은 둘다 노예 제도의 논점에 양면이 있었고, 한번은 거기에 호의를 가지거나 다른 때는 반대하는 것으로 보였다.
전국적으로 테일러는 캐스와 반 뷰런을 물리치고 290개의 선거인단 투표 중 163표를 얻었다. 인기 투표에서 그는 47.3%를 얻어 캐스의 42.5%와 반 뷰런의 10.1%를 앞질렀다. 1848년 대통령 선거는 모든 주들에서 동시에 실시된 첫 번째 선거였다.
테일러는 역사가 마이클 F. 홀트가 설명한 대로 휘그당 강령을 무시했다.
5. 대통령 재임
테일러는 1849년 3월 5일 취임식을 가졌다. 그는 보통 3월 4일에 사무직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일요일에 취임식을 가지는 데 거절당하였다. 어떤 역사가들에 의하면 상원의 대통령 임시로 데이비드 R. 애치슨이 3월 4일에 대통령직이 비어있던 이유로 권한 대행을 맡았다고 한다.
테일러는 자신이 장치적 경험이 부족한 것을 알던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 의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에 대항하여 행동하는 데 아무도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테일러는 워싱턴과 거리를 두었고, 1849년 1월 말까지 서부 사단의 지휘권을 사임하지 않았다. 그는 선거 후 몇 달 동안 내각 구성을 구체화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동료 휘그당원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 신중하고 조용했다. 그는 보직 임명과 정치적 책략을 혐오했지만, 그의 행정부에서 역할을 하려는 관직 희망자들의 쇄도를 견뎌냈다.
그는 민주당원을 임명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테일러는 자신의 내각이 국가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반영하기를 원했고, 따라서 지리적으로 자리를 배분했다. 그는 또한 클레이와 같은 명백한 인물을 제외하고 저명한 휘그당원을 선택하는 것을 피했다. 그는 크리텐든을 자신의 행정부의 초석으로 여기고 그에게 국무장관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제안했지만, 크리텐든은 방금 당선된 켄터키 주지사직을 계속 수행하겠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크리텐든의 측근인 델라웨어 주 상원의원 존 M. 클레이턴을 선택했다.
클레이턴의 도움으로 테일러는 나머지 6명의 내각 구성원을 선택했다. 새로 구성된 의회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내무부를 설립하는 것이었으므로 테일러는 그 부서의 초대 장관을 임명하게 될 것이다. 이전에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과 윌리엄 헨리 해리슨 정부의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토마스 이윙은 내무장관이라는 특혜가 많은 직책을 수락했다. 또 다른 특혜가 많은 직책인 우정총국장 자리에는 테일러는 버몬트 주 하원의원 제이콥 콜래머를 선택했다.
호레이스 비니가 재무장관직을 거부한 후, 테일러는 또 다른 저명한 필라델피아 출신 인물인 윌리엄 M. 머서디스를 선택했다. 조지아 주 전 주지사 조지 W. 크로포드는 전쟁장관직을 수락했고,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윌리엄 B. 프레스턴은 해군장관이 되었다. 메릴랜드 주 상원의원 레버디 존슨은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테일러 내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필모어는 테일러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테일러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대부분 소외되었다.
테일러는 1월 말에 워싱턴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는데, 이 여정은 악천후, 지연, 부상, 질병 그리고 가족 친구에 의한 납치로 가득 차 있었다. 테일러는 마침내 2월 24일 수도에 도착하여 곧 퇴임하는 폴크 대통령을 만났다. 폴크는 테일러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렸고, 사적으로 그를 "정치적 정보가 없고" "대통령직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테일러는 그 다음 주 동안 정치 엘리트들과 만났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그의 외모와 태도에 감명받지 않았다. 취임식까지 2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그는 클레이턴과 만나 서둘러 내각을 확정했다.
테일러 대통령의 임기는 3월 4일 일요일에 시작되었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취임식은 다음 날까지 열리지 않았다. 그의 취임 연설은 국가가 직면한 많은 과제를 논의했지만, 단호한 행정부의 조치 대신 의회에 대한 존중과 지역 간 타협이라는 통치 스타일을 제시했다. 그의 연설은 또한 얽히는 동맹을 피하는 워싱턴 대통령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취임 후 테일러는 자신의 관심을 원하는 수많은 관직 지원자들과 일반 시민들과 만날 시간을 가졌다. 그는 또한 폴크와 돌리 매디슨의 장례식을 포함하여 이례적으로 많은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이젠하워에 따르면 테일러는 매디슨의 추도사에서 "퍼스트 레이디"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1849년 여름, 테일러는 자신이 거의 알지 못했던 지역을 익히기 위해 미국 북동부를 순회했다. 그는 여행 중 대부분을 위장병으로 고생했고 9월에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 지역 갈등 ==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서 합중국에 가입하는 데 준비하면서 1849년 새 영토들에 노예 문제의 확장에 논쟁이 최고 기록에 도달하였다. 테일러는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처음에 영토로 만드는 것보다 즉시 주로서 인정하는 데 의회에 역설하였다. 이 방식으로 그는 영토들에서 노예 제도에 논쟁들을 피하는 데 희망하였다.[28]
그러나 남부인들은 화를 내면서 새로운 주들이 합중국으로 인정되기 전에 다른 노예 문제들의 조정을 요구하였다. 다음 6개월 동안에 의회는 그 위대한 토론들 중의 하나를 가졌다. 남부인들은 탈퇴를 위협하였고, 북부인들은 합중국을 인정하는 데 명령에서 전쟁을 약속하였다. 많은 노예들에 빚을 졌어도 테일러는 북부의 편에 들었다. 그는 합중국을 지키는 데 무력을 쓰는 보증을 하였다.[28]
켄터키주의 상원 헨리 클레이를 포함한 다수의 의원들은 타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테일러는 아무 타협을 경멸하였고 캘리포니아가 합중국으로 편입되는 주장을 하였다. 타협의 지지자들은 결국 이겼으나 필모어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회는 그러고나서 1850년 타협으로서 적용되는 데 많은 법들을 채택하였다.[27]
미멕시코 전쟁 후 미국이 획득한 멕시코 할양지와 관련된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군사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어떤 지역을 주로, 어떤 지역을 연방 영토로 할 것인지 불분명했고, 그 지역의 노예 신분 문제는 의회를 격렬하게 분열시킬 위협이 되었다. 남부인들은 캘리포니아의 인구 및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준주, 뉴멕시코 준주, 유타 준주가 자유주로서 연방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했다. 또한 남부인들은 북부인들이 탈주 노예들에게 제공한 지원에 대해 점점 더 분노하고 있었다.[28]
동시에 북부인들은 워싱턴 D.C.에서의 국내 노예 매매 폐지를 요구했다. 텍사스는 뉴멕시코 동부 지역 일부를 주장했고, 영토에 대한 권리를 군사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주방위군을 파병하겠다고 위협했다.[28]
남부 출신의 노예 소유주였던 테일러는 노예제가 멕시코 할양지에서는 경제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불필요한 논쟁의 원인이 되는 그 지역에서의 노예제에 반대했다. 그의 주요 목표는 지역 간의 평화를 유지하고 입법적 타협을 통해 연방을 보존하는 것이었다.[28] 남부의 분리 위협이 커짐에 따라 그는 뉴욕의 상원의원 윌리엄 H. 수어드와 같은 반노예제 북부인들과 점점 더 협력하게 되었고, 그러한 법안이 그의 책상에 도착한다면 연방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윌못 조항에 서명하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28]
테일러의 관점에서 최선의 방법은 캘리포니아를 연방 영토가 아닌 주로 편입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노예 문제를 의회의 손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 승격의 시기는 테일러에게 유리했는데, 그의 취임 당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캘리포니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8]
뉴멕시코-텍사스 국경 문제는 테일러 취임 당시 미해결 상태였다. 멕시코로부터 새로 획득한 영토는 연방 관할하에 있었지만, 텍사스인들은 산타페 북쪽의 광대한 땅을 주장했고, 그곳에 상당한 거주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자기들의 영토에 포함시키려고 했다. 테일러는 뉴멕시코인들의 주장을 지지했고, 처음에는 연방 영토로 유지하는 것을 추진했지만, 결국 의회에서의 노예제 논쟁을 줄이기 위해 주 승격을 지지했다.
오늘날 유타주의 몰몬교 정착민들은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데저렛 주를 수립했지만, 의회의 승인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테일러 행정부는 캘리포니아와 유타 준주를 합치는 것을 고려했지만, 대신 유타 준주를 조직하기로 했다. 몰몬교의 종교적 자유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테일러는 그들이 연방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의회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을 가질 것이라고 약속했다.[28]
테일러는 1849년 12월 의회에 그의 유일한 국정 연설을 보냈다. 그는 국제적 사건을 요약하고 관세 정책과 행정 조직에 대한 몇 가지 조정을 제안했지만, 의회가 직면한 지역 갈등이 그러한 문제들을 압도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의 주 승격 신청에 대해 보고하고, 의회가 그대로 승인하고 "지역적 성격의 그러한 흥분되는 주제의 도입을 삼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 니카라과 운하 ==
포크 대통령 행정부 동안 태평양 연안 영토 획득으로 중앙아메리카를 가로지르는 수로 건설이 다시 주목받았다. 미국의 비지니스맨들은 니카라과를 통과하는 운하 건설권을 획득했고, 영국도 관심을 보였다.
1850년, 미국과 영국은 클레이턴-불워 조약을 체결하여 운하의 중립성을 보장하였다. 테일러 대통령과 존 M. 클레이턴(John M. Clayton) 국무장관은 외교 경험이 부족했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을 공유하며 외교 정책을 클레이턴에게 위임했다. 이들은 1848년 혁명의 자유주의자들을 지지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은 제공하지 않았다.
테일러 행정부의 외교적 성과 중 하나는 클레이턴-불워 조약 체결이다. 미국과 영국은 니카라과 운하 건설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은 영국-미국 관계 발전을 촉진했으며, 테일러 대통령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5. 1. 니카라과 운하
포크 대통령 행정부 동안 태평양 연안 영토 획득으로 중앙아메리카를 가로지르는 수로 건설이 다시 주목받았다. 미국의 비지니스맨들은 니카라과를 통과하는 운하 건설권을 획득했고, 영국도 관심을 보였다.1850년, 미국과 영국은 클레이턴-불워 조약을 체결하여 운하의 중립성을 보장하였다. 테일러 대통령과 존 M. 클레이턴(John M. Clayton) 국무장관은 외교 경험이 부족했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을 공유하며 외교 정책을 클레이턴에게 위임했다. 이들은 1848년 혁명의 자유주의자들을 지지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은 제공하지 않았다.
테일러 행정부의 외교적 성과 중 하나는 클레이턴-불워 조약 체결이다. 미국과 영국은 니카라과 운하 건설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은 영국-미국 관계 발전을 촉진했으며, 테일러 대통령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5. 2. 지역 갈등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서 합중국에 가입하는 데 준비하면서 1849년 새 영토들에 노예 문제의 확장에 논쟁이 최고 기록에 도달하였다. 테일러는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처음에 영토로 만드는 것보다 즉시 주로서 인정하는 데 의회에 역설하였다. 이 방식으로 그는 영토들에서 노예 제도에 논쟁들을 피하는 데 희망하였다.[28]그러나 남부인들은 화를 내면서 새로운 주들이 합중국으로 인정되기 전에 다른 노예 문제들의 조정을 요구하였다. 다음 6개월 동안에 의회는 그 위대한 토론들 중의 하나를 가졌다. 남부인들은 탈퇴를 위협하였고, 북부인들은 합중국을 인정하는 데 명령에서 전쟁을 약속하였다. 많은 노예들에 빚을 졌어도 테일러는 북부의 편에 들었다. 그는 합중국을 지키는 데 무력을 쓰는 보증을 하였다.[28]
켄터키주의 상원 헨리 클레이를 포함한 다수의 의원들은 타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테일러는 아무 타협을 경멸하였고 캘리포니아가 합중국으로 편입되는 주장을 하였다. 타협의 지지자들은 결국 이겼으나 필모어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회는 그러고나서 1850년 타협으로서 적용되는 데 많은 법들을 채택하였다.[27]
미멕시코 전쟁 후 미국이 획득한 멕시코 할양지와 관련된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군사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어떤 지역을 주로, 어떤 지역을 연방 영토로 할 것인지 불분명했고, 그 지역의 노예 신분 문제는 의회를 격렬하게 분열시킬 위협이 되었다. 남부인들은 캘리포니아의 인구 및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준주, 뉴멕시코 준주, 유타 준주가 자유주로서 연방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했다. 또한 남부인들은 북부인들이 탈주 노예들에게 제공한 지원에 대해 점점 더 분노하고 있었다.[28]
동시에 북부인들은 워싱턴 D.C.에서의 국내 노예 매매 폐지를 요구했다. 텍사스는 뉴멕시코 동부 지역 일부를 주장했고, 영토에 대한 권리를 군사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주방위군을 파병하겠다고 위협했다.[28]
남부 출신의 노예 소유주였던 테일러는 노예제가 멕시코 할양지에서는 경제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불필요한 논쟁의 원인이 되는 그 지역에서의 노예제에 반대했다. 그의 주요 목표는 지역 간의 평화를 유지하고 입법적 타협을 통해 연방을 보존하는 것이었다.[28] 남부의 분리 위협이 커짐에 따라 그는 뉴욕의 상원의원 윌리엄 H. 수어드와 같은 반노예제 북부인들과 점점 더 협력하게 되었고, 그러한 법안이 그의 책상에 도착한다면 연방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윌못 조항에 서명하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28]
테일러의 관점에서 최선의 방법은 캘리포니아를 연방 영토가 아닌 주로 편입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노예 문제를 의회의 손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 승격의 시기는 테일러에게 유리했는데, 그의 취임 당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캘리포니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8]
뉴멕시코-텍사스 국경 문제는 테일러 취임 당시 미해결 상태였다. 멕시코로부터 새로 획득한 영토는 연방 관할하에 있었지만, 텍사스인들은 산타페 북쪽의 광대한 땅을 주장했고, 그곳에 상당한 거주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자기들의 영토에 포함시키려고 했다. 테일러는 뉴멕시코인들의 주장을 지지했고, 처음에는 연방 영토로 유지하는 것을 추진했지만, 결국 의회에서의 노예제 논쟁을 줄이기 위해 주 승격을 지지했다.
오늘날 유타주의 몰몬교 정착민들은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데저렛 주를 수립했지만, 의회의 승인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테일러 행정부는 캘리포니아와 유타 준주를 합치는 것을 고려했지만, 대신 유타 준주를 조직하기로 했다. 몰몬교의 종교적 자유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테일러는 그들이 연방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의회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을 가질 것이라고 약속했다.[28]
테일러는 1849년 12월 의회에 그의 유일한 국정 연설을 보냈다. 그는 국제적 사건을 요약하고 관세 정책과 행정 조직에 대한 몇 가지 조정을 제안했지만, 의회가 직면한 지역 갈등이 그러한 문제들을 압도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의 주 승격 신청에 대해 보고하고, 의회가 그대로 승인하고 "지역적 성격의 그러한 흥분되는 주제의 도입을 삼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6. 사망
제커리 테일러는 1850년 7월 9일, 향년 65세로 사망했다.[76] 노예 제도 논쟁이 격화되던 중, 테일러는 위경련을 앓다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43][35] 그의 시신은 루이빌 근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부인 마가렛 여사도 1852년 남편 옆에 묻혔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암살설이 제기되었으나, 1991년 유해 발굴 결과 암살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41]
1850년 7월 4일, 테일러는 건설 중이던 워싱턴 기념탑에서 열린 모금 행사에서 체리와 아이스밀크를 다량 섭취했다.[43][35] 며칠 후, 그는 알 수 없는 소화기 질환으로 심각하게 아팠으며, 군의관은 이를 콜레라 모르부스로 진단했다.[31] 이는 당시 다양한 장 질환을 포괄하는 용어였으며, 당시 유행했던 콜레라와는 관련이 없었다.[31]
병세가 악화되어 회복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테일러는 7월 8일 의료진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말을 남겼다.[36] 그는 정직한 의무를 다하려 했으나 오해와 모욕을 받았다고 토로했다.[36]
테일러의 사망 이후, 밀러드 필모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1853년 3월 4일까지 남은 임기를 마쳤다.[76] 필모어는 1850년 타협 법안에 서명하여 테일러 행정부의 당면 과제 해결을 시도했다. 뉴욕 시 공통 의회는 특별 위원회를 통해 1850년 7월 23일 뉴욕시에서 테일러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37][38]
테일러는 유리 창판이 있는 기밀 피스크 금속 매장함에 매장되었으며,[39] 1850년 7월 13일부터 10월 25일까지 미국 의회 묘지의 공공 납골당에 안치되었다.[40] 이후 그의 시신은 켄터키주 루이빌의 테일러 가족 묘지로 운송되었다.[40]
테일러의 사망 직후, 독살설이 제기되었고 21세기에도 이러한 주장이 이어졌다.[41] 1978년 해밀턴 스미스는 암살설을 제기했고,[43] 1881년 존 빙엄은 제퍼슨 데이비스가 테일러를 독살했다고 주장했다.[42] 1991년, 유해 발굴 및 중성자 방사화 분석 결과, 비소 수치가 낮아 독살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45][46] 테일러는 오염된 음식이나 음료로 인한 "콜레라 모르부스 또는 급성 위장염"에 걸린 것으로 결론지어졌다.[47] 당시 의료진은 이페카쿠아나 , 칼로멜 , 아편 , 퀴닌 등을 투여하고 피를 뽑는 등의 치료를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47]
7. 역대 선거 결과
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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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리버디 존슨(법무장관), 윌리엄 메러디스(재무장관), 윌리엄 프레스톤(해군장관), 테일러(대통령), 조지 워커 크로포드(육군장관), 제이콥 콜라머(우정장관), 토마스 유잉(내무장관), 존 미들턴 클레이튼(국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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